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p.264
마침내 우리는, 말하자면 의지 현상의 본질이
칸트에 의해 반발력과 견인력으로 올바로 표현된 한에서,
심지어 단순한 물질에서 이미, 투쟁 그 자체로서 보면,
이제까지 고찰한 모든 의지 현상들의 서로에 대한 투쟁을 다시 인식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물질은 서로에 맞서는 힘들의 투쟁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갖게 된다.
만약 우리가 물질의 모든 화학적 차이를 도외시하거나,
또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아주 멀리, 화학적 차이가 없는 곳 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제 단순한 물질,
구형으로 된 세계, 그 세계의 삶, 즉 의지의 객관화를 이루는 견인력과
반발력 간의 투쟁인 것이다.
오늘은 카페에 와서 쇼펜하우어를 잠시 읽었다. 제대로 집중해서 책을 읽은지가 오래 되었었다. 오늘은 약간 무언가 착잡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위의 구절을 읽고나서 부정적인 기운이 달아나 버렸다. 항상 무언가 힘들어질려고 할 때 마다 나에게 힘을 주는 책이다. 나도 이러한 도움이되는 나의 철학을 글로 써서 남들을 도와주고 싶다.
오늘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돌아오고 나서, 밥 먹으러 나오면서 고민했다. 지금 나는 삶의 의미를 잃고 있는 거 같다고. 나는 이전 포스트들 중에서도 말했듯이,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항상 명확히 인지하고 체화하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으러 갔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중에 생각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돈을 잘 벌게 되는 것일까", "유명세를 얻어 인기 있어 지는 것일까", 등의 여러 물질적인 것, 의미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이 나왔지만, 그런 것들은 반드시 아니라는 생각이 나의 마음속에서 튀어나 왔다. 밥을 먹고 나와서는 생각 없이 카페에 와서 위의 구절을 읽고 머리 속에 있던 복잡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깔끔히 사라졌다. 쇼펜하우어가 내 머릿 속을 정리해준 느낌이였다.
다시 아까 집을 나서면서 가졌던 질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내가 아까 생각했던 질문에 대한 물질적인 답은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좀 더 다른 것이다. 어쨋든 그 두 가지에 대해서 다시 정리를 해야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나를 찾는 것이다.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그렇게 되려고 시도 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그 결과로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었기에, 이전에 찾아 놓았었기에, 그리고 또 다시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기에, '삶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사람의 고유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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